오늘 너무 슬픔

🔖 온전하고도 깡마른 사람이 되고 싶어

나는 먹보면서 동시에 형편없는 페미니스트다. 아마도 그럴 거다. 만약 내가 남자였다면 여자일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방식으로 먹고 살았을 것 같다. 피자를 엄청 많이 먹었을 거다. 마운틴듀를 넘치도록 마셨을 테고, 다이어트도 안 했겠지. 그렇다면 나는 내가 여자기 때문에 피자를 먹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건데, 다른 여자들을 보는 내 시선은 또 어떻겠는가? 내가 내 몸을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다른 여자들의 몸을 사랑할 수 있나? 좋은 페미니스트로 행세하기 위해 "나는 내 몸을 사랑해"라고 말하고 다닐 수야 있다. 하지만 그건 내가 미워하는 무언가를 사랑하는 척 꾸미는 짓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먹보면서 좋은 페미니스트기도 하다. 아마도 그럴 거다. 그래도 솔직하기는 하니까. 지금 나는 당신에게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내 몸과 다른 여자들 몸을 보는 방식을 규정짓는 비틀린 도식들을 아직 부수지 못했다고. 그러니 당신도 당신만의 엿 같은 도식들을 얼마나, 어떻게 부수고 있는 중인지 내게 솔직하게 말해도 된다는 뜻이다. 당신이 뭔가를 꼭 부숴야만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나와 함께하자는 뜻이다. 여기서 이렇게, 부수지 못한 채로 함께하면서, 바로 이것이 우리의 처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우리가 존재하는 바로 이곳에서 서로를 사랑하자. 심지어 우리가 서로를 비교하는 순간에도. 그래, 친구야, 힘든 일이라는 거 나도 알아.


🔖 내가 인간이 아닐 수 있게 도와줘

거긴 클리토리스가 아니야: 사랑 이야기.

나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는 그저 섹스라는 걸 알고 있었던 바로 그 섹스가 그리워: 사랑 이야기.

너는 나를 내 인생에서 구해주지 않겠지: 사랑 이야기.


🔖 친구들을 가까이, 불안은 더욱 가까이

음, 지금 당장만 해도 나는 이 글이 당신에게 재미없을까 봐 두렵다. 지금 나는 평소에 쓰던 가면을 벗고 있다. '내 상태가 좆되긴 했지만 그래도 통제할 수는 있다'는 표정을 짓는 가면. 그 가면은 당신에게 이렇게 말해 왔다."걱정 마세요. 그래도 나는 충분히 나를 추스를 수 있는걸요. 이렇게 불안을 넘어서서 여러분을 웃겨 줄 정도는 되죠. 나는 괜찮아요."

최근에 한 여성 독자가 말하기를 내 글이 '징징거리는 계집애' 같지 않아서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녀는 내 유머러스한 가면이 좋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공황 발작에 하도 시달려서 징징거리는 계집애가 되지 않기가 힘들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징징거리는 여자애가 되어 볼지를 나 스스로 정하고 싶다! 정 내 글이 당신의 흥미를 떨어트릴 거라면 흥미를 떨어트리는 방식은 내가 통제하고 싶은 거다. 당신을 지루하게 하는 인격을 창조해 선보이고 싶다. 진짜 나 자신이, 나의 연약하고 인간적인 면모가 내 통제 밖으로 새어 나가는 바람에 당신이 도망치는 상황은 원치 않는다. 나는 절박해지고 싶지 않다.

만약 내가 정말로 안 괜찮다는 걸 당신이 알게 되면 어떡할 건가? 내가 지금도 엄청나게 고통스러워하고 있으며 진짜로 공포에 질려 있다는 걸 당신이 안다면? 내게서 도망칠 건가? 나는 그 결과를 알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내 연약함을 유머로 또는 고리타분한 지혜로 감추는 것이다.

언젠가 무척 존경하는 여성 음악가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녀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다고 알려진 사람이다. 오랜 세월 빼어난 재능을 발휘했지만 기행도 보여주었고, 공개적인 자리에서 발작을 일으킨 적도 몇 번 있다. 그녀는 광기와 재능을 둘 다 가진 사람이다.

인터뷰어는 그녀에게 평소 일상에 대해 물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식사준비를 하시나요? 달걀 프라이를 만든다든가요." 그러자 그녀는 그를 차갑게 쳐다보며 대답했다. "나는 달걀을 안 먹어요."

그 순간 나는 그녀에게 묻고 싶은, 물어볼 가치가 있는 단 하나의 질문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재능이란 게 대단히 민감한 정신과 근본적으로 연관이 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런 정신 때문에 당신이 고통받아야 한다면, 그럼에도 재능 있는 사람이 될 가치가 있는 걸까요?"

그녀가 대답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고통에서 해방되고는 싶지만 재능을 놓치긴 싫다고 할 수 있다. 둘 중 하나만 선택하고 싶지 않다고 할 수도 있다. 나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당신에게 닥친 불운에 고마워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당신이 얻은 행운이 그저 행운이기만을 바란대도 괜찮다고.


🔖 그러게 크니시는 먹지 말라고 했잖아

누군가와 장기적인 관계를 나누다 보면 상대방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곤 한다. 상대방이 하나의 독립체로 보이지가 않는 것이다. 하나의 가능성으로 보였던 사람이 언젠가부터 내 소유물로 보인다. 혹은 그 사람이 사라질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된다고 해야 할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간극이 있고, 두 사람이 서로를 만나려면 그 간극을 넘어야 한다.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지, 문자를 보내 줄지, 나를 좋아하는 게 맞는지 등의 의심으로 가득찬 간극을. 우리는 그 간극 안에서 섹스하거나, 그 간극 너머로 섹스한다. 그런데 장기적인 관계에 접어들면 우리는 우리가 소유한 것처럼 느껴지는 새로운 공동 공간에서 섹스하게 된다. 아니, 어쩌면 그 공동 공간 자체가 우리 사이에 있던 바로 그 간극인데, 그 안에 들어가서 섹스하고 있으니 간극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 남편에게 키스할 때는 앞으로도 영원히 입을 벌리고 하겠다고 다짐한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모습을 이대로 정지시키고 싶다. 짙은 눈썹, 자다 일어나 섹시하게 헝클어진 머리카락, 잠기운이 묻은 눈. 하지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우리가 보는 모습 그대로 정지시킬 수 없다. 아무리 간절히 원하더라도. 나중에 나는 다시 입을 닫고 남편에게 키스하게 될 것이다. 심지어 마음까지 닫고 키스할 날도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의 사랑을 위해 기도한다. 내가 언젠가 닫힌 마음으로 키스하더라도 내 마음이 다시 열릴 수 있기를. 남편에게 욕망을 느낄 대면 내가 남편을 욕망할 수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다. 결혼 생활에서 서로를 늘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사랑하는 사람은 우리 눈에 아예 안 보이게 되기 십상이다.


🔖 불안 아래에는 슬픔이 있네, 하지만 누가 거기까지 내려가겠어

이 주제에 대해 어떤 트위터 계정들은 내가 보이겐 멍청하기 그지없는 말을 해 댄다. "우울하거나 슬프면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세요." 우울한 사람에게 이딴 미친 개소리를 하면 안 된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차라리 자리에 앉아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들과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는 편이 훨씬 도움이 되었다. 내가 효과를 본 방법은 내 곤경을 통해 나 자신을 웃기고, 인터넷의 은총을 빌려 다른 사람들도 웃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살아 있는 경험, 그 존재성이란, 미래에 닥칠 죽음의 비존재성과 연관되기 때문에, 혹은 연관되지 않기 때문에, 혹은 연관이 있으면서도 없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에게 너무나 아프게 다가오는 것 같다. 어쩔 때는 살아 있는 게 너무나 아파서 죽고 싶어진다. 나는 죽는 게 무섭고 슬픈데, 그것이 바로 내가 겪는 아픔의 일부다.

어째서 우리는 이 진실을 두루 살피고 인정하지 못할까? 그럴 여력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두렵거나 슬프지 않을 때는 그 진실에서 도망치니까.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

내 안에는 슬픔의 바다가 있고, 나는 평생 그 바다를 막을 댐을 쌓아 왔다. 나를 그 바다에서 구원해 줄 무언가가 있으리라고 상상하면서. 하지만 어쩌면 바다 그 자체가 궁극적인 구원일지도 모른다. 직선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감정의 세계에 빠져보는 것이다. 왜 아무도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을까? "네 슬픔의 바다를 즐겨. 거긴 두려워할 게 아무것도 없어"라고 누군가가 알려 주었더라면 이제껏 그 많은 댐을 쌓을 필요도 없지 않았을까? 나와 같은 사람들은 자기 안의 바다를 다루는 능력이 남들보다 부족하거나,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어서 더욱 겁에 질리는 것 같다. 그래서 엿 같은 댐을 쌓는 것이다. 하지만 댐은 아무리 쌓고 또 쌓아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댐은 무너지고 바다가 다시 말을 걸어온다. "나는 살아 있어. 이건 진짜야." "나는 죽을 거야. 이건 진짜야."